슬픔으로 인한 잠에서 깨어

2009년 2월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22:39-53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에 대한 기본적 단위로서의 인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서양의 개념에서보다 동양에서 보다 더 그런 경향을 읽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자신보다도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습과 그 남편이 잘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측면에서는 구시대의 한 모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주고 싶은 것이 또한 한 중심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밤 늦게 들어와서 잠든 모습들을 보면 남편 자신이 더 잘해야 할 것인데 하는 중심에서 미안해 할 수 있는 모습, 그런 가운데서도 또한 새 힘을 내고자 다짐하는 것이 또한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고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사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건강한 가정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신부로 표현할 때에, 그 신부된 교회가, 성도가 주님에 대한 확신이나 그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 슬픔으로 인해 잠들 때가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7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저희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돌던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기도하심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슬름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 47절에서 53절말씀에서는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입맞추고 인자이신 예수님을 파는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지적하시니 그 좌우가 그 될 일을 생각해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 것과 주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에 있을 때에 그들이 잡지 아니하였음을 지적하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있던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위격적 차이를 드러내시는 것으로서의 인성적 차원을 통해 우리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인데, 그 위격적 차이를 상대적으로 비로소 해석적 모순이라는 객관적 근거지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할 때에는 부정이나 모순으로서의 부정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아바 아버지로부터의 정당한 사실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며 인간으로서의 정당하다는 판단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범과 동시에 십자가를 지시는 성자로서의 그 감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적 당위성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보이시는 것도 하늘로부터의 사자의 도움도 언급되어짐으로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여러 상념에서 고통을 잊고싶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괜히 예수를 주로 따라왔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입장이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드러내도 의미없는 상황에서 잠이나 자자는 심정인 것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도 그 지역의 유지들로 보이는 자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 피해본 자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떠나달라는 푸대접을 받았지, 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배척해서 다른 길로 가야하는 것이지..

뭐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할 때에 앞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한다고 하지.. 그래 예수님이 죽는다고 할 때에, 그를 따르는 우리는 뭐가 될까..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볼 때.. 그냥 위로차 하는 이야기지 그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 감람산..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친 것과 같이 숨기 쉬운 곳으로서 감람산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 제자들이 와 있는 심정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반역자를 수색한다고 하면 다른 곳보다도 그곳 감람산을 먼저 수색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제자들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이 후회되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욱 제자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쯤 떨어져서 기도하시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예수님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놓고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열심당 시몬과 같은 사람을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그분에 대하여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 앞서 있는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너희를 청구했다'는 말씀과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것입니다.(눅 22: 31~32)


즉 본문의 문맥을 먼저 볼 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했을 예수님을 잡히게 되는 그 상황이라는 것 앞서 주님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먼저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아무도 나에게 기도하지 않는 것 같아도 본문의 앞섬이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통해 그 앞서 이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음과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본래적으로 앞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자로서의 주님의 기도는 상대적인 실제로서의 현실적 시험이 성도를 비로소 넘어지거나 실족함의 사실을 구한다고 해도 그것의 실제적인 성립은 기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도 여기에 기준되어지는 것이며 예정하심의 현실적 섭리로서 항상 성도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정 사실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맥적 본문을 주목해 볼 때에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한다는 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실제적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함을 의도한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1~33)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제자들에게 감추였다는 것은 그 죽으심과 부활의 자기 계시는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죽는다' 또는 '산다'라는 즉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와 같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서 예수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상대적 판단 속에서 절대를 읽지 못하고 현실적 사태가  실제인 것과 같이 납득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가진다는 것에 인식적 강요를 당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실적 실제의 궁색한 표현들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슬픔은 체념의 고통을 잊기 위한 잠을 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청구한다는 것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밀 까부르다'라는 표현은 알곡과 실재라는 실제를 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임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실재론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 것이 사단의 청구내용의 핵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에 대해서

누가복음 36절의 말씀에서는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검 두자루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였고 주님께서는 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2:38 참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검이란 예수님을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성령의 검으로서의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서 행할 때에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임을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데, 제자들은 현실적인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족하다고 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심과 또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의 역사적 현재를 이루시기 전이므로 그들의 인식적 한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메시아적 마음에 꼭들었던 사람으로 그 증거가 있었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그 뜻하심을 분별할 수 없었음의 구차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실재적 실제의 분별이 형성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예수님을 판다는 상황인식에서 물리적 검을 사용함의 당위성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에 따른 강변일도의 입장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자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터부시하고 극단적 배척을 하거나 성도들의 자기 비하적 개념으로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예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850대 1명으로서 하나님의 불을 내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보였건만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오히려 아무 감각도 없고 심지어 되지도 않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그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로 그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였고, 그러한 바른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합왕조는 예후의 사역에서 아합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세벨까지 죽임을 당하는 신원하심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적기라고 생각되는 그 때에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의 실제를 믿는다면 엘리야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자기를 실족에 내몰지 않고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예수님의 실재와 실제의식을 결여한 제자들은 현실적인 실제에 믿음 보다는 도의적 차원에서의 강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하시는 경건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본문에서는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는 말씀과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음을 상기시키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 개념에서만 본다면 잡히는 자의 입장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러한 것을 취한다고 할 때의 한 개인의 편협한 그리고 궁색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황상의 개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이 골리앗을 대면하여서 '너는 창과 방패로 나가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삼상 17:45 참고)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서 자기 부정이라는 것을 자기 능동으로 취하신다는 것을 객관적 규정을 지으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자신이 허락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시험의 모든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거하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하나는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과 같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사단이 그것을 의도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더욱 곤고하게 서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밀 까부르는 듯한 시험을 이미 자신이 받으심으로써 이제 더 이상 시험이 현실적으로 성도들을 비로소 정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고전 10:13)는 그 뜻하심을 증거하심으로 성도들의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이 어려울 때면 어떤 한 시인이 한 말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냥 참고 견디는 것으로서의 버티기적 개념도 유용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제의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를 받는 가운데, 도의적 경건이 아니라 믿음의 경건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짐에서 찾을 때,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무엇이 진정한 삶의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세상에서의 비몽사몽간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슬픔을 인한 잠'에서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을 갖추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는 우리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 청구할 만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검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갖추는 즉 깨어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시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가운데, 주의 강한 군사들로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주의 뜻을 행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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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9/02/13 19:43 | 주간설교
샘 해리스에게 보내는 답장
 

글을 씀에 있어서

이 글은 '샘 해리스(Sam Harris)'의 글(각주1)에 대한 답장으로서의 글이다. 오랫만에 참으로 '인내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인 이 책에 대하여 답장으로서의 일반 서평적 글을 쓰려고 한다.(각주2)

필자는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 저자 샘 해리스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한 사람의 무지한 희생자라는 측면에서 측은한 생각이 든다.(각주3)

그의 보내는 방식과  유사하게 한 명으로서의 무신론적 입장인 저자에게 보냄으로써 전체 입장을 같이하는 분들에게 답장으로써의 글을 쓴다.



본론

1. 신학 사조와 작금의 비판적 배경이해

이와 같이 무신론자들을 비롯한 과학주의의 도전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신학사조의 변화에 따른 경향을 말할 수 있다. 현대 신학 사조에서 신복음주의의 실패라는 판단이 있었다.(각주4) 이러한 것에서 그 증거의 동일성과 사실성이 다른 성경과 과학의 조우라는 것이 준비되었는데, 그것은 신복음주의에서 과학에 답변함에 있어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과학이라고 함에서 종교를 판단함이나, 성경이 과학과 대화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그러한 대화의 노력이 있게 된 것인데, 여기서 과학이 더 자기 중심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2. 성경의 자증(autopistia) 인문학에 대해

신복음주의의 실패라는 평가가 있는 가운데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인문학적 바탕을 참고로하는 학문적 노력이 있었다. 그러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이루어진 논문들과 편집본을 접할 수 있다.(각주5)

이것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은 신복음주의와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과학적 또는 수사학과 같은 인문주의적 개념의 도입을 시도하는 것이었다.(각주6)

좀더 언급한다면, 어떤 이들은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실제적 입장을 마음에 두지 않고는 그 표현적 입장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즉 공허한 개념으로서의 언급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 자기계시에서는 자존적 하나님의 실재론적 증거로서의 성격을 가진 계시로서의 '스스로 증거하는 성격'으로서의 성경의 자증(autopistia)이라는 영원적인 주어진 본래성을 가진 것으로 기록된 성경 계시가 나타나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구성적 정당함을 스스로 구별하여 실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시는 일반 책들의 인식적 구성주의와 달리 특별(자존적 정당함에서의 실재와 실제의식으로 분별하는 사역에로의 부름을 받은 자들의 평범한 행보의 섬김이라는 특별)영감으로 인식적 구성을 통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그러함을 근거로 계시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면 상대적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동일한 정당함 속에서 사실을 분별할 수 있는 권세가 성도들의 인식에 주어진 것이며, 사태에 대한 인식에서 사실을 말씀의 본래성의 재가에 따라 진정한 사실로서 증거하는 것이다.(각주7)

물론 이러한 신학적 사실에서 인문학 자체도 그 사실의 당위성에 따른 그들만의 보편의식을 허용적 당위성에 따라 말할 수 있음에 따라서 그 학문의 영역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범위에서 새롭게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각주8)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 비단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주체로서의 사람들의 인식의 새롭게 함에 대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현상적 판단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분명한 언급을 할 것중세와 다른 점에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중세의 신관은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보편성을 하나의 여럿 해석적 가능태들 중의 하나로서 생각하는 하나의 상식보편적 개념 또는 철학적 보편적 특이성의 보편성을 의지할 뿐임으로 인해 억압하는 고정시키고 인식의 주체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중세의 암흑기라는 합리성이 있으면서도 실족으로서의 합리성으로 나락의 길을 걸어왔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3. 합리적 이성과 논쟁의 성립과 종결 

1)
합리적 이성이란 무엇인가?

저자 샘 해리스는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합리적 이성이란 표현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주관적 근거지움을 최소한 객관성을 가진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실제적 기준이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과학적 합리성과 그 확실성이 있음을 저자는 인정하지만 그것도 역시 모순,파라독스는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어떤 한정적 개념에서의 최소한 토론적 보편적 입장의 동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간과하고 있음이 아쉽게 여겨진다.

굳이 지적한다면, 샘 해리스는 통계적인 조사에서 상당한 객관성을 취하고 있고, 수학적 입장에서 언급될 수 있는 입장도 언급이 있었고, 신화라는 개념도 역시 모순이 있을 수 있는 개념에서 취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 그는 그 모순의 판단을 받지않을 만한 보편적 인식을 동의없이 기준으로 삼고 있음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주관적 지혜로움으로 주관적 편협합의 객관성으로 정직을 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할지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의 '이야기 파라독스'(각주9)라는 책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책의 내용에서는 논리, 기하, 수, 통계, 확률, 시간의 파라독스 몇편씩 다루고 있다.

특히 신앙에 관한 통계라고 할 때에도 그 신학사조에 대한 참고 없이 단순한 통계를 기준으로할 때는 그 통계표본자료 등과 같이 잘 설정되지 못함에 따른 결과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신앙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른 사실의 정당성을 마음에 두는 신앙의 기본적 입장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설득력을 표방해도 납득의 당위성은 상실하는 모순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에서 주장에서 모두 그 존재 자체를 기각하도록 요청된다고 하겠다.

2) 과학적 이성에 대하여

과학적 이라는 것도 논리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도 그 객관적 사실의 논의를 위한 근거지움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존재적 당위성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과학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의 운동을 필요로 하는 계기적 인식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과학에서 전제되는 시간적 모호성과 개연성은 한 예로서 '뉴턴의 절대 시간관'을 들 수 있다.

즉. '시간과 시간의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이 공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1분에서 2분 사이 그리고 3분에서 4분 사이의 간격이 동일하게 시간간격으로서 1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일반적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보편적인 역활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 간격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열려진 사고가 요청될 때에는 과학의 사실 규정은 사실로서의 근거지움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사고가 되지 못한다.

3) 신화적 기독교 이해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마틴 가드너의 시간의 파라독스에서도 주목할 수 있듯이 시간의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결정론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측면을 말할 수 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단위 측정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즉 연대의 측정은 방사능 동위원소의 반감기에 따른 것을 기준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는 탄소동위원소를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다른 동위원소로써 측정은 시간 측정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과 시간인식이 그리고 달력에 대한 이해도 역시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틴 가드너가 소개한 시간의 내용의 파라독스 중에서는 결정론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있는데,(각주10) 여기서는 결정론이라는 것을 좀더 생각해보면, 시간의 단위가 경험되어진 가운데서 현실적 시간으로 현상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지구의 연대를 지질학적으로 측정할 때에 성경의 연대와 잘 맞지 않고 더 오래된 것으로 나온다고 할 때에 시간의 파라독스에서 보게되는 결정론적인 개념에서는 '천만년'이라고 하는 것의 시간의 흐름이 현실에 지금으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천만년 같이 지질연대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바로 어제의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시간의 모순의 한 예가 될 수 있고 이것은
결정론에서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

즉 연대적 개념으로 성경의 모순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이처럼 시간의 철학적 결정론과는 다른 것이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도 창조의 개체로서 받을 때에는 시간의 파라독스라는 영역에서 예정론을 비로소 다룰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샘 해리스는 '빈티지 출판사 판본에 첨가된 후기'(각주11)에서는 신화의 발생과 기독교의 발생에 유비적 개념으로 신화에서의 비윤리적 개념을 기독교에 전이적 개념으로 이해를 강요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이것도 유사비교와 동일비교의 차이점을 관계의 보편성을 임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에서 비롯된 인류학적인 접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불가지론은 사실을 말하기에는 그 보편적 근거로서의 객관적 근거지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앞선다는 의식'에서 정당함을 찾는 보편인식에서 비롯된 가운데서 사실 비교를 말할 때에,  사람들의 인식과 구별되어진 인식의 차별성과 독립성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적 사실성을 말함을, 일반 상대적 시간적 보편 인식에 따른 상대적 인식의 연속성으로 임의적인 규정하려고 하는 신화와의 비교 판단 시비는, 앞서 언급한 자존의 하나님의 구별적 재가에 따른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된 사실 시비에서, 기독교 신앙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기각됨을 말하게 된다.

일반 시간의 보편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보편성에서 재가받은 보편성으로서의 시간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기각된 샘 해리스의 임의적 합리성은 기독교 신앙을 비로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 그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대니엘 데닛의《마법 부수기 Breaking the Spell》, 리처드 도킨스의《만들어진 The God Delusion》, 크리스토퍼 히친스의《신은 위대하지 않다》이런 책들도 객관적 근거지움을 위한 보편으로서의 개념이 상대적인 보편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원 보편을 절대 합당함으로써 취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무한이라는 보편의 창조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터툴리안은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닷물을 다 마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해수욕장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건강을 위해서 바닷물을 마셨다는 야사를 전하는 이도 있는데 글쎄, 증명의 개념에서는 터툴리안의 견해가 따를만 하다고 하겠다.

물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에 앞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받으시도록 함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재해석되어진 가운데서의 그의 입장을 통한 언급임을 말해둔다.

합리성과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것과 그로 인한 사태인식을 할 때에 더 나아가 그것을 재가할 수 있는 보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해두는 것은 그 모든 노력들도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상대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하며 그 이름의 영광을 돌리시는 자리에 모든 이들이 서시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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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Letter to a Christian Nation Copyright ⓒ2006 by Sam Harris

각주2) 글을 쓰는 도중에, 샘 해리스를 '저자'라는 호칭을 쓸 것이고, 이글을 쓰는 나는 '필자'로서 혹 표현하게 될 것이다.

각주3) 개념도, 고민도, 체계적인 측면에서 언급도 아닌, 놀란 이성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한마디로, 건방지다는 판단하에서 자신을 노출시켜야만 하는 고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것은 편지글이라고 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기독교 국가에 보낼 정도의 중심을 가졌다면,  잘 준비되어지거나 좀더 전제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마땅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칼 야스퍼스의 '척도를 주는 인간들'정영도 세종출판사과 같이, 어떤 인식론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에 당위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공개적으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아직 조심성이 결여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더욱 그러한 실재적 기준이 결여된 가운데서 정직이니, 윤리적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고 있는 것을 볼때에 식상해진다.

그리고 비판을 할 때는 여러 기독교 종파들과 그 차이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비판해야 할 것인데, 각 문화와 각 나라의 신학적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의적으로 말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란 이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의 책(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p.106)에서 저자 자신이 언급하는데, 무슬림의 공포와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라고 함을 언급하는데, 사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면 뇌의 호르몬 분비에 따른 합리적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런 기본적인 재고사항을 갖출 수 없었던 자의 모습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건방진 모습도 이해가 될 수가 있었으며, 그래도 무슬림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하든 보낼 희망이 없든, 기독교에 대해서 만만히 보든, 그래도 기독교에 답변을 구한다는 측면도 해석 될 때에 그 연민을 마음에 둘 수 있었다.

존 로크나, 키에르케고르도, 대중의 무지에 대하여서 상당히 식상해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입장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그런 저자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다. 개념정리와 숙고가 요구되어지는 자에게 유수한 대학들의 학문의 거성들이 추천하고 있는 것이 선동에 밀린 한 순진한 분의 희생을 보게 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글을 쓰게 됨이 유감이다.

각주4) 간하배, 현대신학해설,개혁주의 신행협회 pp. 180-190.
신복음주의 - 그 실패(Neo-Evangelicalism-It's Failure)를 언급하는 가운데, (성경을 연구하자는 노력이라면 장려해야 할 일이나, 이 토론의 진로는 순전히 유익하지를 못했다. 램과 카넬 등은 과학과 성경의 관계를 많이 취급하였는데 과학을 성경의 빛에 의하여서가 아니고, 성경이 과학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는 인상을 남겼다.(상게서 p.185)

각주5) 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INERRANCY AND HERMENEUTIC, A Tradition, A Challenge, A Debate edited by Harvie M. Conn. Coppyright 1988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49516, America 1991.

각주6)  이것을 반영하는 증거로서 상게서, 성경무오와 해석학에서는 편집자 간하배(Harvie M. Conn)의 언급에 주목할 수있다.
'
우선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자증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한다. 성경의 권위로부터 해석학으로 운송되었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다시 해석학으로부터 성경의 권위로 되돌리는 것이다.(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pp. 36-37.)
그리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입장을 따라서 방법론으로서의 인문학을 선택함을 이렇게표현하고 있다.
'Cornelius Van Til이 애용하던 강의실 표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사명은 suaviter in modo (방법론에서는 너그럽게) 동시에 fortier in re (진실에 대하여는 엄격하게)가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목회적 대처에 대해 어떤 근거를 끌어낼 수 있을까? 보수적 충정과 재구성되는 해석학에 대한 진보적 관심 사이에 최소한의 공동의제라도 있는가?'(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p. 36.)


각주7
)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그 본래성과 그 본래성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 영감은 그 자증하는 성경의 재가라는 차원에서 영감은 'Infallible'(완전영감)이 되는 것이다. 즉 이 완전영감(Infallible Inspiration)에서 축자영감(INERRANCY)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축자영감 자체로서의 영감을 의미하는 것은 소위 '글자놀이', '언어놀이'라는 모순에서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도들이 성경대로 우리의 존재의 실존과 성경을 통해 해석되어진 삶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줄로 재어준 구역으로써, 진정한 나의 삶으로서 실로 아름답다고 고백하게 되며(시 16:6) 그것은 진정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에서 성경해석과 인용에 대한 당위성을 임의적 형식이면서도 재가되어진 인용을 하는데 반해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경솔함으로써 건방진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저자의 글에서 읽을 수 있고 식상하리만큼 성경을 그 본문의 정황의 고려없이 나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에 대한 납득하지 못한다고해도, 최소한, 이해없이 임의적 언급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물론 누구나 경전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와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p. 126.)

각주8)작금의 인식들을 볼 때에, 무엇인 진정한 사태인식에서 사실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서 불가지론과 무신론적 인식으로 고통할 수 있고 단지 철학의 변형이나 개조를 통하여서 보편적인 것을 동의하는 가운데서 개념의 설정과 그 판단에서 객관적 근거지움을 통해 사실을 말하는 정도이다.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대속의 범위와 학문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죽느냐 사느냐는 실존의 상대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하는 것과 그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고 할 때에 재가받는 사태인식은 사실로서의 정당한 사실로서의 실존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들의 실재성의 회생으로 인해 사실이라는 기반으로 학문적 실체의 본래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만물을 새롭게 하심의 뜻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사태인식으로서는 별 차이가 없어도 실제라는 측면은 그 판단을 받지 않거나 또는 그 판단과의 상관성을 풍성하게 한다.

각주9)
마틴 가드너, 이야기 파라독스, 이응신 옮김 김운용 감수 사계절 1997.
Martin Gardner, la magie des paradoxes
. 우리 말로 직역하면 '파라독스의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10) 마틴 가드너, 이야기 파라독스, 이응신 옮김 김운용 감수 사계절 1997. pp. 239-240. 

각주11)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p. 107 이하.

by voss | 2008/06/10 19:42 | answers
하나님의 실재론적 규정(On Yahweh's nameability (Exo 3:14))

On Yahweh's nameability (Exo 3:14)
-no Barth's construction on it-

서론

본 글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조직신학적 이해를 구하는 분'(각주1)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취한 해석적 사실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답변으로서의 글임을 먼저 언급해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사실규정에 대한 나의 입장을 이미 밝힌바가 있다.

여기서 'nameability'를 나는 소위 이단인 '여호와증인'의 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합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규정'이라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과 또한 앞으로 일반적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합당함을 말하고 있다.(각주2) 이것은 저자가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인용적 당위성을 따라서 '신명의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ility)'이란 말로 언급함(각주3)에 대하여서 언어에 대한 실재적인 바른 규정을 밝히는 것이 논의의 주제로 나타나게된다.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신학함에 대하여서 재고할 것이며 그 아래 일반 구성주의에 대하여, 신학적 재구성에 대하여, 그 아래 신학적 사실과 그노력들로서의 보편추구,
합리성자체의 자기 정당화의 한계 등을 다루겠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 따른 시간인식과 역사인식에 대한 양심의 바른 중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과 그 사실과 진리에 따른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본론
 



신학함에 대하여

신학함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합목적적 개념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필요에 한정시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신학이란 용어로서는 하나님과 학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학문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받들기 위한 봉사신학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 앞서 하나님의 속성 그 존재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신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정체성을 바르게 스스로 알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깨닫고 배우는 신앙이라는 동연적 생활의 모습이 신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함이 바로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출3:14)의 의미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인식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하나님을 배우는 신학함의 기본적 사실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1. 일반 구성주의에 대하여..

앞서 신학함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삶의 있어서의 정체성을 언급했다. 이러한 것이 인문적 개념으로 표현되어질 때에 그 상관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구성주의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성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
학습자의 지식 구성 과정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 중의 하나일 것(각주4)'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이미 신학적 입장에서도 도입되어지는 경우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비평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도 사람의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과 변형이 문화접변에 따라 이루어지는 가운데서'(각주5) '성경의 전승'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가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신학적 재구성에 대하여

신학적 방법론에 대하여서 특히 재구성적 신학을 논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는 카우프만 박사이다(각주 6). 재구성이라는 것이 실재를 도울 수 있는 것으로서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재구성적 진실이 진리인가에 대한 자체적 언급들 특히 성경전승의 역사에서의 문제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현실적인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 필요에 따른 것들, '중세에 하나님에 대한 변호의 필요성에서 신학적 접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증거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그 합리성 자체에 두게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각주7)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의 부제와 그 앞서 실재론이 철학적 개념으로 한정되어지는 가운데서, 필요라는 재구성이 신지식 그것이라는 재구성적 진술을 진리로서 강요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언급을 하는 것이 그 또한 이유있는 현대 이성들의 현명하지 못한 지혜이다.

이러한 재구성적 출발과 함께, 성경전승이라는 것, 기록된 성경의 구성적 작업이라고 하는 것 선별적 작업이라는 것의 고통을 가지게 되고 재해석적 작업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그것의 집행자의 믿음이라는 주관적 입장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선하게 이끌어오게 되었다는 점은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재가적 차원에서 실제적 사실로 받으며 증거하는 것이다.

앞서 해석적 작업에서의 재구성을 언급했는데, 본 현대 '조직신학의 이해'에서도 신명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들(각주8)이 문화접변이라고 하는 것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중심의 선별적 언어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신학적 사실을 위한 노력들들로서의 보편추구

개체적 사태인식에 따른 실제와 실존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며 그것의 정당화 즉 사실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보편을 추구해왔다. 인생이 일반 현상적으로 주목할 때의 자연의 보편성(물론 이것은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타락후에도 남아있어서 하나님의 절대보편에 대한 의식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무의식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에서 자기 실존을 이해하는 개체와 보편의식을 가졌음을 지적할 수 있다.(각주9)

개체와 보편의 상호 관계성이 있으면서도 인식의 주체의 주제에 따라서 상대적인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징적 인식의 행보를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에 어떤 사상의 편린들을 표현할 때에 그것의 최소한 타당성의 개념의 설정을 위해 보장되어질 수 있는 범위나 범주로서의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이다.(각주10)

이러한 보편추구에서 신학자들은 각기의 신론적 또는 실재적 개념을 가지고 계시의 현장인 시간을 재구성하여서 자신의 사상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각주1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신론적 또는 실재적 중심이 과연 그 정당함을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에 답변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허용되어질 수 있는 즉 재가되어질 수 있는 상식적 개념에서 단지 가능성의 개연적 당위성에서 언급될 뿐이다.

형식적으로 구교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신의 보편을 말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해석하고 표현을 그 철학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함은 인정될 수 있으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그 철학적 자존자에 대한 것에 대한 개조를 원하는 자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적 입장에서 소위 통전적 비판을 전개하는 것에 열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본인은 둘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교의 입장에서의 자존자의 개념은 성경적인 측면에서 자존자가 아니라 철학적 자존자로서의 해석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잘못되었고(각주12), 바르트의 입장은 그 철학적 신론에 대한 개조를 위한 변증법적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그 사실의 정당성 추구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각주13)

구교 가톨릭이나 현대신학에서 합리성에 따른 재구성으로서의 '객관적 근거지움'을 통한 신학적 진술이 있어왔지만 그것의 합리적 당위성을 타당성의 모습을 통해 세워오면서도 그 타당성이 정당성으로서의 본래성비로소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


'신명의 언표가능성'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은 그 해석적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최대한 가능태적인 실존의 의미부여와 규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때 이해되지만 그리고 그 특이성을 나름대로 바르트의 정신에 따라 규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각주14)

그러나 신명의 실재론적 능력에 따른 규정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들을 기각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에서 비롯됨을 인함인데, 그것은 임의적 상대적 합리적인 것에 따라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과는 달리, 규정적 정당성을 스스로 취하는 가운데서 그 정당성의 절대 본래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존자만이 그 본래성을 스스로 절대성과 함께 영원성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의 해석적 여러방법들 중(각주15)에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해석될 때(각주16)에 그것은 해석의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는 방법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서 스스로 정당성까지도 취할 수 있는 방법론의 형태적 해석 실존체이기 때문에 납득의 당위성까지도 그 해석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 자체를 정당화한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여서 사태인식에서 사실과 진리를 규정하신다는 것이다.






결론

비근한 예이지만, 프랑스 혁명의 예를 들 수 있을 것같다. 프랑스혁명의 의의는 근대와 현대의 국가관이 형성할 수 있는 모형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실패의 모습들에서도 몇가지 마음에 두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에 근거한 사회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는 문화혁명이었기에 가톨릭의 영향이 강한 그레고리역에 대신한 프랑스 공화력을 1793년에 공포했다. 그러나 그것이 십진법적 배열에 따른 공화력이 익숙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즉 시간 역사에 대한 지배권을 내어준 것이다. 즉 프랑스혁명의 실제관이 역사적 정당함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다른 카드놀이도 종전의 것을 폐지하고 '혁명카드가 만들어졌는데, 원래의 카드로 돌아갔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한 노력들은 좋지만 시간의 해석적 유희와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허용될 수 있는 유희는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시간의 인식의 정당성을 무시한 가운데서 역사적 개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합리적인 대안 카드는 '기만을 위한 카드'요 '조커'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인식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 3장 14절 해석(각주17)으로서의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에서 실제의 본래적 정당성을 바르게 찾는 가운데서 성경을 오해하는 일이 없이 주님을 따르게 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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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5-6, 15-41.

책 전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합리성의 실제론에 대한 당위성을 놓게되는 신론적 정당함의 여부와 실존에 대한 언급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 나머지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납득과 판단 수행의 당위성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신론적 입장의 보다 바른 중심의 실재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전반적인 해석적 수행을 요청하기도 하고 또는 기각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
신명의 계시는 신론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조직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상게서 p.19) 라고 언급한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지고 논의되어지며 또한 그러한 것이 조직신학이나 소위 교의학에서도 다뤄질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함이 옳다고 본다. 즉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상호 상관성과 관련성에서와 실재론에 대한 입장에서는 당위성이 이미 설정된 것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저자는 바르트적 입장에서의 그리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적 인사들의 표현적 동등성을 임의적으로 비교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임의적이라는 것은 실재론적 개념의 형성을 일관적으로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르트의 입장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결론에서는 결국 상식적인 개념으로 인지상정적 개념이라는 개념으로 임의적 역설로 글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학문의 깊이와 연구의 범위에 있어서는 상당히 깊이와 넓이를 말할 수 있고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일독을 권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바르트의 해석의 당위성이 실재론이 결여된 합리성에 그치고 만다는 것에 실망할 수밖에 없음에 아쉬움이 있다.


각주2
)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차원에서, 언어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기득권이라는 것이 또는 부여된 인식 자체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기득권과 그 합리성은 새롭게 근거지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열려진 사실이다. 즉 신조어라는 개념도 주의 뜻하심의 당연성에서 객관화되어질 때는 수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본 논의는 그것을 위한 것으로 전제되어진 인식의 행보이다.

'
신명의 언표가능성, 불가능성(Yahweh's nameability)'을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무성(nothingness)신학은 인간과 관계되는 실재(reality)라는 면에서 언급되어질 수있는 존재론을 견지하고 있다(장성민, -김균진교수감수,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바울 p. 16.) 이와 같이 그의 당위성을 합리성에서 요청할 뿐 본래성을 말하는 중심이 없는 신론적 존재에 대한 입장에서 변증신학을 열기 위한 신론해석을 위해 단절이라는 해석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 저자가 본서에서 언급한 바르트의 내용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론적 당위성을 위해 신론을 임의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측면에서의 합리성이지 결국 합리성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표 가능성 또는 언표 불가능성의 공존으로서의 변증신학적 해석은 그 합리적 당위성이 실제를 비로소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급한 '신명의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ility)'는 실재론에 따라서 의미규정이 바뀌어 규정되어야 한다.


각주3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29, p. 31.

저자는 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바르트를 따라서 오히려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을 따르고 있다. 물론 단절이라는 그런 개념에서 임의적으로 불가능성 자체가 알려진 것이라는 점에 그의 중심을 두고 있다.(상게서 p.41)


각주4)
N. N. Spivey. 구성주의와 읽기 쓰기 : 읽기 쓰기 의미구성의 이론,신현재외 박이정 2002, 2004 (옮긴이의 말中)


각주5)
N. N. Spivey. 구성주의와 읽기 쓰기 : 읽기 쓰기 의미구성의 이론,신현재외 박이정 2002, 2004  pp.69-72. 74-81.

본서의 저자
N. N. Spivey는 제2장 바틀렛의 회고 부분에서, 『기억』연구에서 다루어진 “유령들의 전쟁(The War of the Ghosts)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기억의 번형에 대한 실험관찰을 가지고 있고 그 피실험자들의 의식의 변형을 가져옴에 대한 연구가 언급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전체적인 내용에 맞추어서 변형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없는 것도 더 만들어내거나 또는 그가 접한 문화에 따라서 그 인식의 변형이나 적용도 달리 나타남에 대한 것도 한 부족을 통해서 언급한 내용이 따로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의 전승을 말할 때 과연 그러한 내용을 구성하는 사도들과 및 전승자들의 인식도 유사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평학도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비평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칸트가 죽고 거의 1세기 후의 한 논문에서 계몽주의에 의해 태어난 역사적 비평을 지도하는 세 가지 근본 원리에 대해 결정적인 요약을 제공하였다. 1. 방법론적 회의의 원리, 2. 유추의 원리, 3. 상관성의 원리.
(로버트 스트림플, 현대 복음서 비평에 관한 개혁신학적 조명, 예수 그는 누구인가? 여운세, 생명의 말씀사 p. 23.)

1번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인식과 의식의 변형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며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접변과 같은 상황적 영향력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몽주의적 개념에서의 구성성은 전승에서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비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논의되고 있는 신명의 실재적 규정에서 답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6)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중략) 이제 카우프만은 자신이 신학을 신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또는 재구성신학(reconstructive theology)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우프만이외에도 신학, 특별히 지금까지의 조직신학을 구성신학, 재구성신학으로 부르는 많은 신학자들 및 그들의 책(대표적인 것으로 Reconstructing christian theology (R. chopp eds.)와 Winds of the spirit :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P. Hodgson)]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용어를 가장 앞서 사용한 사람은 카우프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재구성적 개념으로서의 신학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사실화할 것으로서의 실재론은 언급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임의적인 합리성의 사변적 존재의 슬픔이며 기만이 되는 것이다.

현대신학에서 실재론이 부재한 가운데서 재구성된다면 그것은 사태의 실제나 사실로서의 진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은 없게 된다는 판단하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각주7)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이형기 차종순 I p. 191.

반면에 이단들이 제기한 도전은 또 다른 형태의 응전을 가져왔는데 다름이 아닌 신학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사상과 붓대는 전통적인 기독교보다는 좀더 합리적인 기독교를 보이겠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자극을 받았으며, 이들이 곧바로 신학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단을 부인하는 선을 넘어서서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했다.

필자 : 이러한 신학활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신학함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신명적 실재론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믿는 하나님에 대한 재구성적 입장의 필요성에 입각해서 시작함에 그것이 전도되어지는 즉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라는 임의적 강조가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중심이 있었지만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조건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과 같은 또는 사도신경과 같은 그러한 신명의 실재론에서 구별할 수 있는 여러 재구성적 활동을 한 것에 대하여서 그 사역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실재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가운데서 그 재구성 산물의 정당함을 구별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진 것과 그것은 인위적 재구성의 범주로 전락하는 당위성에서 실제로 자유할 수 없었고 없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이다. 신플라톤의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은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초기의 정황과 인식의 상황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음과 그것을 증거하기위한 한정적 차원에서의 철학적 기술이었음에서는 그의 신앙만큼은 신실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재구성은 새롭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주 8)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19-20.

예를 들면, 신명에 대한 미디안 가설이 그것이다.

모세에게 여호와/야웨 신명이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전제에서 이 신명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모세가 미디안에 피신하여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고(출 2:21f.), 그 곳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야웨를 만났으며(출 3:1-15), 출애굽 후 다시 그 곳에 들렀을 때 그의 장인 미디인 제사장이 여호와/야웨의 위업을 찬양했으며 함께 희생제사를 드린 것(출 18:11-12)에 근거하여 여호와/야웨는 본래 미디안 족속의 신으로서 그들의 성소인 시내 산에 거처하던 신이었는데 모세가 그 성소의 제사장인 그의 장인을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다는 미디안 가설이 제시되었다.

인접 문화 '삶의 정황'이라는 것이 그 상관성에 있어서 영향력이 있어진 가운데서 구성되었음에 대한 해석적 구성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트뢸취의 비평학적 입장이 그대로 반영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평적 신학의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설이면서도 대안이 없을 때에는 사고의 발판과 기저로서 요청되어진 사실로서 형성되어지는 것과 같은 인식의 변형을 통해 사실과 진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한 입장이 바로 실재론의 인식과 정당성의 시비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본 논의의 중심인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에 관한 이해와 증거이다.

이것에 대하여서 답변으로서 로버트 스트림플게할더스보스예수의 자기계시(THE SELF-DISCLOSURE Of JESUS(The Modern Debate About The Messianic Consciousness))로 나타난 그의 사상적 지원에서 답을 찾고 있는데
그의 실재론에 입각해서 주목할 때에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에 대한 사상적 기조를 볼 수 있다.
(로버트 스트림플, 현대 복음서 비평에 관한 개혁신학적 조명, 예수 그는 누구인가? 여운세, 생명의 말씀사 p. 29.)


각주9
) 개체와 보편의 의식의 기원이라고 함을 말하는 여러 가설은 여기서 다 다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기술적 수행의 모순이라고 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신명의 실재론적 기반의 정당성에서 전제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적 사실을 바로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의 서술을 이어가도록 한다.


각주10)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칙연산'이란 것도 '덧셈','뺄셈', '곱셈', '나눗셈'이라는 계산방식의 범주내에서 개체조작은 무한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에서 조건을 달리 주어서 다른 연산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다른 연산의 세계, 다른 경우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근한 예 외에도,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어떤 그 상황하에 있던 사실들도 달리 생각해야 함이 요구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진 학문의 영역들도 모두 각자의 보편적 세계를 구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학적 사실에 대한 것도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하여서도 그 타당성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 진술이라고 하는 것 그 인식의 사태에서의 인식되는 실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본 논의의 핵심인 이러한 신학적 재구성에 진술이 사실임에 대한 정당성 시비의 기준으로서의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 비로소 하나님의 절대보편을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 신명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 또는 불가능성의 계시라는 변증적 개념이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각주11)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최대희 뿌리와 이파리 2003(
UMGANG MIT GESCHICHTE by Hans-Jurgen Goetz 1995) p. 35.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가 동시에 권력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어떤 국가가 역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이 국가에서는 기억을 채워주고 개념을 손질하여 과거를 해석하는 자가 바로 미래를 획득한다.”(Michael sturmer, zit. nach Hans-Ulrich Wehler: Aus Geschichte lernen?. S. 32.)

이러한 언급이 있듯이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실재(reality)개념으로 독특한 시간을 가지고 역사철학을 전계하고 또한 신학적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신학자들의 개별적 시간관에 대하여서는 정기철 교수가 개괄적으로 논의한 적이 있다.(정기철, 시간문제와 종말론 -시간의 철학과 시간의 신학- 한들출판사)

정기철 교수는 그의 서문격인 '감사의 말'에서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의 창조(과거)와 지속(현재) 그리고 종말(미래)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수반되어야 할 사항은시간을 영원과 관계에서 규정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가 없다.'는 언급을 했다.
(상게서 p. 6)

시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여러 측면을 주목하고 사유할 수 있음에 대한 것은 열어놓아야 하고 그것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정당한 시간인식이라고 함의 사실적 시간과 그에 따른 역사를 마음에 두지 못한다면 역사가로서의 양심은 이미 기만이라는 점을 우려할 수 있는 것은 또 한 사람의 역사가의 지론이다.

"..양심에 관련된 진술은 결국 역사가가 동시대를 사는 사람에 대하서 또는 역사연구의 결과를 섭취하는 사회에 대해서 져야 마땅한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체는 동시대의 역사서술이 삶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약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역사서술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역사를 다루는 방법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잘못된 역사방법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을 갖고 있지 않는 역사가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최대희 뿌리와 이파리 2003 p. 30.)

과연 역사를 말하는 그 실재(reality)개념의 인식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말하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임의성을 인정해야 하며 그들의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함의 주장적 입장이 기각됨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총체적 기각속에서 재가되어질 수 있는 부분 또한 기술가능성이 허용되어질 수 있는 부분등이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 신론적 보편성에서 재가되어서 한정적으로 규정하여 받을 수 있음은 또한 열려진 사실임을 말할 수 있다.


각주12)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 한국천주교 가두선교단 2005, 2. p.33

"유대인과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에서는 Yehovah(여호와)로 부르나, 더 정확한 발음은 Yahweh(야훼)임이 입증되었다. 이 이름의 뜻은 "나는 있는 나다."(출애 3,14)라는 의미로사람들을이하여 활동적으롱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 내용은 아주 기초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 가톨릭의 공식적인 증거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선교책자는 우리나라 외에도 5개국으로 번역되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상게서 p. 96 마지막 속페이지)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은 없이 그냥 존재(Being)을 말하고 있다. 그냥 있음 이라는 개념으로서의 말이기에 '자존자'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에큐메니칼과 같은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수행적 모순적 입장에서도 이야기 할 수 있음은 열려 있다.

더욱 에티엔느 질송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 대하여서 코넬리우스 반틸이 반론을 제기한 것이 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 1번 중에서 참고)


각주13)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40, p. 31.

바르트 역시 “나는 나다.”(출 3:13f.)라는 신명 계시는 사실상 그 내용에서 “나는 그 누구도 언표할 수 없는 진실한 이름을 가진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하여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그 이름을 통해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된 이름은 참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은폐됨(the hiddenness even of the revealed God)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피조물이 이름이 아니므로 영원하고 거룩하고 영광된 이름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것이다.


필자의 평 : 앞서 '각주 2)'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바르트의 무성(nothingness)신학에서는 본문 해석은 변증법적인 개념을 위해서 신론적 입장에서 계시적 단절과 존재론에 대한 배제를 위해 계시라는 행위적 의미에 한정시키고 있다. 여기서 이미 바르트의 신학의 실재로서 신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성의 실재로서의 신론을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실재개념을 위한 합리적 당위성을 위한 해석으로 재해석을 한 것뿐이다.

비평적 입장에서 바르트의 인식을 본다고 할 때에, 19세기 당시에 있게 되어지는 가톨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개조하고자 하는 그러한 당위성에 따른 철학을 선택했음에 인식적 정황을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그의 철학의 합목적성을 철학의 개조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나의 이 저술은,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듯이 내용과 일치하는 유일하고 진실하다고 승인될 방법에 의하여 철학을 새로 개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헤겔, 철학강요, 서동익 을유문화사 1998, p.33. 제1판 서문 中)

이러한 언급은 구교의 입장의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2판과 3판의 서문에서 종교 특히 예수의 뜻하심에서 언급되는 것에 대한 적개심이 있음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일 그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신조를 고백하여 '나는 하느님 아버지, 즉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믿는다 하자'...사실 위에 예는 누구나 터무니 없고 변변치 못한 것으로 알 것이다.)(상게서 p. 39)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 아무 관계없는 여러 가지 외형적 사물에 관해서 광범위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와 반대로, 아니 그만큼 노골적으로, 신앙의 본질과 내용을 대하여서는,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고의로 무시하고, 또 기독교회의 신앙의 토대인 설교의 발전, 전개를 무시한다..)(상게서 p. 49)

두 예들 중에 후자는 헤겔 그의 정신현상학적인 개념으로서 정신이 세상에 적용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함이 옳은 것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배운 신학에서의 주기도문의 한 부분 즉 하늘의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정신의 발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헤겔의 철학이 신학적 형태의 개념을 마음에 두면서 철학을 하고 있고
이것의 의식은 바로 구교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개조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서 바르트의 입장에서는 그의 실재론을 그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서 무성(Nothingness)의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서의 구교의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개조를 의식했을 수 있다는 중심에서 헤겔적인 변증법적 신학방법론으로서의 재구성을 선택했다는 정황적 인식의 재해석이 가능해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조의 현상과 사태를 형성하는 합리적 개념을 축적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재구성(construction)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실제론은 그의 실재개념(reality)로서의 'Nothingness'에서 재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서 임의적으로 재해석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사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시간해석과 역사해석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그 시간의 보편성을 따라 나타나는 계시의 실존과 그 자체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은 역시 비로소의 진리로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각주14)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39.

'야웨 신명이 신명으로 특이한 것은 그 신명 자체 속에 신명의 연표불가능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이름 야웨는 그 형태에서 한정적인 명사형의 이름이 아니라 서술적인 동사형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웨라는 신명에는 일의적이고 명사적인 의미가 없다. 동사적이고 서술적인 이름이다. 따라서 시제에 따라 현재형 미래형, 사역형, 동행형 등 여러 의미로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한다는 것은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한다는 특이한 계시법을 포함하는 것이 계시한다는 것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상게서 본서에서는 신명의 능력을 표기한대로 '신명의 언표 가능성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음을 언급한 후에' 또한 바르트의 계시의 단절적 개념을 생각한 가운데서의 계시로서의 변증법적 성격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언급한 것으로 합리적 표현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증법적 개념에서의 계시라고 함을 규정하고 출애굽기 3장 14절을 해석해야 함의 당위성은 그 해석 자체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때에 과연 사변적인 해석이요 또한 의도적인 해석으로서 무성의 신학을 위한 당위성이 결여된 신학을 위한 변명에 치우칠 뿐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임의적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성의 인식사태에서 실제를 말하는 것에 한계인 것이다.


각주15)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25-28.


각주16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특히 출33:19절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이름을 반포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심과 주권적 개념의 자기 이름의 해석임을 말씀하심으로 받을 수 있을 때에 그냥 존재(Being)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된다.


각주17) 출애굽기 3장 14절 해석의 중요성과 우선성에 대하여서는 당시 사두개인들의 인식적 측면을 고려할 때 즉 1차 독자로서의 예수님과 대면할 때에 그들의 판단적 오류는 사람의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한 것 즉 부활에 대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이 출애굽기 3장에 내용을전제로 말씀하셨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막 12:26) 즉 이 본문을 해석 잘 못할 경우에는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의 실존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논의에서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논의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부분에 그 취지를 밝혀둔다.

by voss | 2008/03/30 17:51 | 토론방
갑절의 영감(The inspiration of God)

2008년 1월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하 2:1-11
갑절의 영적감동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이 웃음을 창조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인데, 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통한 어떤 복에 대한 개념이 동양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나 또는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들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적 개념에 익숙해진 가운데서, 현대의 삶의 바쁨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것에 대한 간과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락을 통한 노력들이고 직업적인 정신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개그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그에서도 사실 여러 차원이 있어, 색다른 개그를 구사하는 실력들로서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긍정적 사회 문화로서 이해하게 되는데, 개인적이면서도 어쩌면 공적인 측면에서의 시비라기보다는 지나친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차원이 다른 개그를 말함에 있어서, '허무개그'를 말할 수 있는데,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서 웃기지 않는 것을 웃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그래서 황당하다는 개념에서 비로소 웃음을 말하는 중심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재 선정에 있어서 한번은 신앙의 구원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전근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개그행위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즉 '나 9원 받았네..', 땅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나 10원 주었네.. 받았네..' 그것도 신앙의 기도적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언급하는 것이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실제적 모습이라는 비유적 개그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허무개그적 개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적 발상에 대해서 한편은 상당히 불편하고 질책할 수도 있으면서도 실제의식이 결여되어진 사회속에서 불가지론적 개념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사회의 인식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에, 질책보다는 불쌍히 여김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의 은혜적 사모함이 바른 자리매김으로 세상에 빛을 비출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마음을 두어야함이 옳다고 함을 인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목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시려고 할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 나가는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따르게 되어지고 이와 같이해서 벧엘에 가고 또 여리고까지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서는 선지생도들의 말과 엘리사의 말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라는 말과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가는데, 엘리사가 따르는 모습을 첫 번째 본문의 형식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요단의 선지생도들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엘리사의 답변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가에 이 두 사람이 서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함에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엘리야 자신에게는 어려운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취하시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증인의 전인격적인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또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적 흐름에서 주목하면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고백이 있게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로 인해서 두려워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새 힘을 얻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아합왕의 아들 아하시아가 난관에서 떨어져 병이 나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함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계셔서 그들에게 묻는가 하는 반문과 왕이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전에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그때와는 달리 산의 공제선을 의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가림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었습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디셉사람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50부장과 그 수하들을 세차례 보내게되는데 두번까지는 모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죽였고, 세번째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하시아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가서 그 면전에서 예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시고자 할 때에 엘리야와 그를 따르고 있는 엘리사 이 두 사람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전인격적인 그들의 증거를 주목해 봅니다.

엘리야 그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 )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그 이름이 그들의 존재적 삶의 전인격적 증거임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 등장하는 가운데 좋은 이름의 악한 자의 모습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임의적 개념에서의 그러한 이름으로서의 치장적개념으로 일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중심은 전자의 입장으로서 신실한 이름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인격적 삶의 증거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God is salvation)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상관성을 추종적 동행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머물라고 함에 대한 것으로서의 그 의식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성을 나타내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개념으로서의 구원을 정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한정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실재적 개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 엘리사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흐려놓기 위해서 임의적인 신을 말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를 허구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정직하지 못한 이성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만적 개념으로 죄를 범하는 모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이슬람에서의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의 표기 '하나님'과 동일하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링크되는 글 각주 1번참고)한국에서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슬람을 말하는 것인지를 재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중심의 신앙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필요성에서 비로소 언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하심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에 예정되어진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셈의 장막에 머물게 되는 것(창 9:27)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의 기본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전인격적인 노력과 방향과 구함의 실제적 연속성을 기반으로한, 증거를 읽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함에서 그 열매적인 풍부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된, 속된 표현으로 짝퉁, 즉 모조물이 있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중심을 흐려놓게 되는 시대적 정황적 악함이 있게 될 것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 그 말씀이 오늘날 시대적 인식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있으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의 시대적 정신의 발현이라고하는 그러한 악함의 모습이 있을 때에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엘리야의 전인격적 신앙이 그 신앙의 그 구원의 열매의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선택한 미련한 구원 전도는 세상의 허무개그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세상의 감당하지 못하는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영적 감동과 구원의 실제를 우리의 삶 속에 담아내게되며 증거하게 된다고 하심을 그 증거의 실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론적 사실의 정당성은 상대적 개념의 사실 시비를 바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형태로서 절대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의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또는 한 가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앞으로 되어질 일 즉 하나님께서 엘리사 위로 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려고 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적 증거일 때에 그러면 엘리야는 그 가는 그 특정 지역에 머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의식의 차이이면서도 반목이냐 아니면 더 풍성한 주의 뜻하심으로서의 그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에 머문다는 개념과 함께 실제적 의미부여와 사실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명들을 주목해 볼 때에 '길갈'(a wheel, rolling)이라는 이름의 지명은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다'(수 5:9)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의 법괘를 맨 제사장들의 발길이 그 요단강에 닿을 때에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의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쌓았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의 종 애굽의 즉 함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함의 신앙고백적 중심을 실제로하는 성례전적인 언약적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일성수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그 삶의 모습을 길갈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머물러라고 하였던 것, 즉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함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뜻하심을 증거하였고, 엘리사가 그것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그로 인해 믿지 않고 단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배당에만 나온다고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사의 순종하지 않으면서 증거한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와서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며 감정적 동요로서 자기를 기만하고 자위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는 것이요.. 앞서 자존의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그 믿는 자로서 마땅히 그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구별된 장소 벧엘에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엘리야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전혀 말하지 않고 신없는 종교 또는 아무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기만적 행위의 사실과 기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에는 구원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체험한 또는 그것에 실족한 자들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 등떠밀린 신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개그일 뿐이요 비소의 씹힐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 '우리 성도들이 씹히지 않도록 하시며'(시 124:6)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고 된다는 것을 믿고 기억하며 증거할 때에 그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어지는 갑절의 영적 감동하심의 큰 권세는 주의 몸된 교회에 있게 되며 또한 그 시기적 개념이 아니라 본래적 개념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단 허무개그 뿐이겠습니까..세상에 내놓으라 하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자들의 지성과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야말로 차원 개그의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의 불가지적 개념과 그러한 가운데서 '유희'를 말하는 '해체'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허울좋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써의 '신은 죽었다'는 계보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구교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잘못한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에 대한 것이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추종적 동행의 두 증인이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관심도 없고 임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신이 죽었다고 하고 ...에휴.. 그만한 허무개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려..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도록 엘리야와 엘리사를 두 증인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으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음을 기억하고 참으로 우리의 삶의 상대적이면서도 진실로 받을수 있는 구원의 사실과 증거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에 따른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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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8/01/22 02:27 | 주간설교
손 마른 인생

2007년 12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6:1-11
네 손을 내밀라

어떤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그 손으로 집어주며 먹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받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는 있어서 그 받는 사람의 절실한 입장이라고 할 때에 받아 먹을 수도 있고 또 굴욕적 강요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적 여지를 감안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신앙적 실제의식에 따른 판단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절대'라는 획일적 고립적 성립되지 않는 그 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성은 자존의 자기 정당함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상대적면서도 절대적인 실제의식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절대자 하나님 자신의 받으심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며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목해 볼 때에, ''이라는 표현이 증거로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과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내용의 기술적(記述的) 전반적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적 증거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에 따라 어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적 위반을 말하면서 시비(是非)를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임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아 송사할 빙거를 찾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심에 따라 그 손이 회복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송사할 빙거를 찾던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동일본문과 문맥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되어진 복음서 기자의 의식이 또한 주의 말씀에 따른 증거를 위해 특별 영적인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되어지는 해석적 당위성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안식일이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 성례적 기호적 표적으로서의 손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행하신 성찬이 그 전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증거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시적 표적적인 거룩한 예표로서 읽을 수 있는 성례로서 각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고쳐진 '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쉼이라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 안에서 그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을 나타내는 부활하신 날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시간적 개념의 전통적 안식의 규정적 입장보다 바른 안식의 실제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으로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하심과 섭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거짓을 범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읽지 않고 그가 쓴 책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과 같이, 그것을 주장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우기는 것이요 잘못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의 실존이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 자기 속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자신이 그와 같은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셨고 그 안식에서 주권적 정당함을 취하심에 따라 상대적 관점의 시비라는 것에 실존적 정당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제자들의 인식과 행보라는 것에 있어서의 판단도 주의 뜻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경우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첫 안식일에 있는 주의 답변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바로 '세상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나는 지팡이가 뱀과 같이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읽게 하시는 것이며, 또한 무슨 상대적인 말들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시려는 것으로 연결되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손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하여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일로서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손 마르다는 개념이 위생적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럽다는 개념으로 바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정상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몸의 질병적 개념으로만 볼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정당함에서 판단되는 행위들로서 정체성을 잃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개념이 이입되어짐의 당위성을 설정함의 정당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가인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벨보다 가인이 더 수고하고 노력해서 밭의 소산들을 드렸다고 하는 측면에서 더 받음직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서의 성례전적인 양을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보와 그려한 행함의 손은 하나님께 드림과 섬김으로서의 정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그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청함받은 자들의 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로서의 손길과 다른 것으로서 마른 손에 비교되어지는 진실로 고침을 받아야 할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성례전적 증거로 받을 수 있음의 타당성과 일관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습임을 받게 될 때에 본문과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난 두 번째 기적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6~7)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신 18:15; 행 7:37)을 예언했던 모세의 증거를 마음에 둘 때에 예수께서 모세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체험을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자존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의 증거와 같이 예언되어진 메시아 구주이심에 대한 것과 구약이 증거하는바 예수님을 믿음이 옳으며 믿게될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손을 고쳐주심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주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낼 모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어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상대적인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황적 실존일진대 절대와 상관하겠다는 것 절대에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당위성을 비로소 얻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고 할 때에 과연 인생의 손은 마른 손입니다.

즉 속된 표현이지만,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같이 아무리 고귀한 척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 앞에서 무엇인가 받을 만한 행보를 나타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시는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적 기준에서 마련한 그 방법, 절대의 정당함을 얻는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게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받으신 바를 행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손 인생..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나의 중심과 삶에 기준으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마른손으로서의 인생의 모습이 치유함을 받아,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 바되는 그 섬김으로서 잘했다 칭찬함을 받게 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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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7/12/12 13:00 | 주간설교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2007년 11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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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7/11/04 23:40 | 주간설교
요한의 탄생

2007년 9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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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7/09/11 03:56 | 주간설교
종교세와 피랍사태 이해에 대하여

피랍자들의 귀환과 함께 여러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어떤 방송국의 보도를 기억하는데..

무성한 여러 비판적인 말들을 주목하여 볼 때에 그 문제는 피랍된 사실과 현상에 대한 임의적 해석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적 인식들이 대부분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들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종교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논리적 언어를 말하고 있고 그러한 언어들의 도단적 입장에서 여론을 의도화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디자인 하는 것같습니다.

종교세라는 입장을 근거로 종교에 대한 간섭적 정당성이 세워진 것으로 아직도 착각하시는분들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종교세라는 개념이 정교의 분립을 말하는 것에서는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는 종교세의 의무적 위반이라는 점에서 더 격양된 기독교 선교의 사고사태에 대한 부담금에 대한 입장이 확고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립은 어거스틴 이후에 좀더 명료해진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정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서방교회의 전통이 되어왔고 종교개혁 이후에 신교의 입장이 되어 왔습니다.

종교세를 말하는 것은 이런 정치 종교의 분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납세의 의무와 함께 참정권의 권리적 행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가 정치적 입장의 선동도 합법적이고 또한 '이익단체'나 '압력단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세도 가지게 되어지고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결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이번 피랍사태에서 본다고 할 때에 오히려 구상권 청구권과 지금의 모든 비난하시는 분들의 입장도 그 입지도 좁아지는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문책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앞으로 모든 정치적 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법적원칙을 생각할 때에, 임의적으로 그러한 관계성을 넘나드는 언어적 표현과 인식들은 법이해의 몰이해와 또한 의도적 여론을 디자인하는 더 나아가서 선동적 입장으로 오히려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여론을 환기시키는 투표도 정치와 종교에 대한 분립적 개념을 상황적 개념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재조정하겠다는 것이며 객관성도 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여론의 환기를 위한 투표라고 하는 것도 전문적인 언어로서의 선교와 그에 따른 사고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여서 실시된다면 그것은 인식의 통계의 표본을 잘못 설정한 것으로 그 결과의 여부라고 하는 것은 어떤 보편적 규정적 역활을 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전문적 언어와 그에 따른 인식과 사태이해를 요구하는 것을 일반적 측면의 보편의식으로 비로소 판단한다는 자체와 그러한 판단들의 보편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 인식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분되어진 범주적인 인식을 상식적인 개념으로만 접근하고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는 것은 그 보편이라는 것이 규정적 역활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할 수 없습니다. 즉 이해와 인식의 범주가 벗어난 가운데서 여론의 향방을 의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부적절하며 하나의 편견일뿐, 일반적으로 보아도 전문성 있는 악한 의도적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없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개념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안다는 개념이 상식적인 측면에 그쳐서 이야기 될 것인지 아니면 전문성을 갖추어야 할 것인지, 기독교와 그 선교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선교에 대한 이해가 되어질 수 있고 또한 국가에 대한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이해와 앎에 대한 전제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적절한 인식의 기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서 알권리를 말한다는 것 또는 의도하도록 한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으로도 납득되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이성적 판단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짐에 있어서 주체적 인식으로서의 문제적 인식을 불러올 수 있는 오류에 대하여서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즉 문제의식을 가지는 인식의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들의 인식이 정당한 것인가, 판단의 당위성이 현실적으로도 헌법적으로도 정당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허용되어진 인식과 언어를 통해 비판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비판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특정 언어와 그 행함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어지는데 그것을 일반 상식적 개념에서 너무 난발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비판적 인식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봅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종교세에 대한 언급이 이미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특정 종교에 대한 안티적 입장에서의 상식적이지 못한 맹목성에서 선례를 두지 않는 대국민서비스의 내용청구와 같은 것은 그 합목적인 측면에서 구상권이라는 법의 실행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이미 범법이나 또는 대국민서비스로서의 부적절함을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앞서 말한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개념에서의 법 이해의 위반되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세를 납부하도록 주장하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헌법에 위배되며, 이처럼 의무만 강조하고 권리를 간과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이성을 잃은 자들의 행보인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라고 할 때에는 그 납세의 의무와 정치적 권리에서 자유라는 것도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각주1). 납세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정교의 분립의 법적 원칙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참고 : 피랍사태에 대한 비판의 추이

아프간 피랍자 합동 기자회견 문답






각주 1)물론 이 표현은 세상적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을 언급한 것을 밝혀둡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인간의 통치함의 상관성과 방향성에 대하여서 더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일반 국가 통치적 정치적 입장에 국한되어진 가운데서 논의라는 점에서 국가적 입장에서 종교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언급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재성이라고 함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는 국가의 통치권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그 가운데 합당하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인식의 차이와 인식의 방향의 문제인데, 정치적 실재와 실제의식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와 실제의식으로서의 통치의 개념은 정치적 실제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제개념의 투여와 실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일방성의 당위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적 입장이 상대적인 정치적 실제입장의 실존을 실제적으로 주관함과 정당함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 정치적 개념에서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납세와 권리의 병행적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적 국가임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럽식의 국가관으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도 역시 앞서 말한 납세와 권리라는 개념으로 한정지을 수 있는 정치적 한계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으로서 납세라는 개념과 그에 따른 요청적 권리요구라는 개념으로 비로소 판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기억할 때에 논의의 필요성이 더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통치라는 측면에서의 한정적 시비라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납세와 권리의 같이 실존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립적 헙법정신의 한정적 입장을 기억할 때에 납세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은 또는 납세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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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ss | 2007/09/06 01:41 | answers
피랍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보면서

글을 씀에 있어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피랍되어진 사건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마음을 같이해주고 또한 국가의 희생적인 그 외교노력과 그 결실에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감사를 드린다.

그와 같은 고마움과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윤리적 도의적 차원에서 쓴 비판의 목소리까지도 받고자 하는 중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대중을 기만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에 대하여서는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사태파악을 바르게 바라보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서 말한 겸손의 한 일환이라고도 본다.

기독교의 특수성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여론적 입장이 잘못되어지고 있음과 오히려 상식적이지 못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주장들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 국민으로서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합당하지 못한 인식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검증도 요구되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 후에 여론의 반영이라는 실제적인 행보가 국가적으로나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본인이 볼 때에는 그러한 객관성이 결여되어진 일반 국민으로서의 타당적 인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대두되어지고 있는 언급들에 대하여서 몇가지 점에서 그 인식의 타당성에 대한 사실을 가늠하고 결론적인 측면에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본론

1. 윤리와 도덕과 법에 대하여서..

어떤 사태에 대한 법적 이해와 그에 따른 적용여부를 말함에 있어서, 할 수 있다는 가능태적인 개념으로만 비로소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개념의 관계성에서 종교의 자유라고 함이 있고, 그 법적인 재제의 당위성이 허락되어질 수 있는 것에서 해석과 구체적 법적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라는 것에 있어서의 법적인 허용이 이미 되어진 상태에서 그 의도하지 않는 사고에 대하여 법적 조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물론, 국가의 노력과 국민들의 같이 마음 아파하신 것에 대한 도의적 개념에서 의도되어질 수도 있고, 대국민서비스라는 것에 있어서도 스스로 제한을 받겠다는 도의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고 또한 한 것이지, 대국민서비스라는 것을 받을 수 없는 법적 범죄와 같이 인식하고 그 범죄적 벌금형식으로 부담을 강요하는 것으로써  피랍사고를 범죄로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판단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앞서 여러 인질구출에 대한 전례를 보아도 그런 예는 없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질의 수가 많다는 개념과 국가의 노력이라고 함의 경중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범죄적 개념에서 대국민서비스적 행보를 마땅히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비판하는 대중의 여론을 도모하는 자들의 인식에서는 본의 아닌 사고를 범죄로 말하고 싶어하고 있고 그로인한 대국민서비스를 부정하고 싶어하고 또한 범칙금을 부과하는 형태를 갖추려고 하고 있다.

더욱 교회의 입장에서 사과하는 것은 죄를 범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국민들의 함께 마음을 써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과 고통에 대한 사과인 것입니다. 그러한 도의와 예의를 범죄자라는 개념으로 또는 범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은 전혀 일반 이성으로서도 타당성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사고를 범죄로 인식시켜서 법적 아래 놓겠다는 자들의 무분별한 여론몰이에서도 나타고 있다.

어떤 가능성의 합리성에서 진정성으로의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각주 1), 중요한 것은 법이라고 할 때에 해석적 당위성도 중요하지만 이미 기존적 법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법리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함을 생각함이 좋을 것이고 합리적이라고 본다.


2. 신원공개를 요구하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합리적이지 못한 기만적인 것으로써 익명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대국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런 입장을 할 수 있는 대행적 권세가 그에게 비로소 있는지 묻고 싶다. (각주2)



3. 무리한 여론의 행보를 주목하면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지에서 돌아왔다고 하면 기뻐하고 또 그 누구든지 국민으로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다른 인질사태와는 다르게 유독히 비난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있어 보인다는 판단이 상식적으로도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서 특정한 자들의 비방적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는 판단도 따라서 성립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일반 국민으로서의 여론의 진정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여론이 국정에 반영된다는 것도 실제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결론에 즈음해서

하나와 여럿의 문제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즉 종교와 국가의 문제라는 것도 이러한 범주적 이해가 필요한 것인데 그러한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거나 또는 임의적으로 그 논의의 방향성을 바꾸어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대중의 인식을 기만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서 무고한 자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음에 대하여서 그 죄값은 계산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 수용할수 없다고 하여도, 한국에 있는 이슬람 신자들을 국민으로서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이러한 것에 대한 사태에 대하여 범 이슬람의 입장을 재고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구상권을 진정으로 청하고자 한다면, 이슬람권 나라들에게 청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슬람의 원리주의자들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이슬람권에서는 그것에 대한 구상적 청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세계적인 사과를 해야함이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대 국민적 입장에서 일어나야할 여론의 상식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은 우리 성도들의 순교의 핏값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분노해야 할 대상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여론의 합리적이면서도 당위성이 결여된 모습으로서의 행방이다.

이 글은 자숙의 형태만 갖추는 것으로서 외식하기보다는 대국민적 인식의 향방의 바름을 위해 언급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러한 노력이 자숙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범죄가 아닌 사고로 인해 같이 마음 아파하고 희생적으로 노력한 국가에 대한 예의로서의 자숙임을 밝혀둔다.

국가와 온 국민의 노력과 관심을 감사드리면서..






















각주 1) 어떤이의
법적처벌이라고 함을 내세운 언급을 보면

제가 전에 글을 썼듯이 아프카니스탄은 회교국가이고 이나라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헌법에 준합니다.

코란에는 이슬람종교인의 개종을 금하고 이슬람국가에서의 선교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경우 사형당합니다.

실제로 이프카니스탄 이슬람 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아프카니스탄 정부에서 체포 사형 시킨일이 있습니다.

법은 속지주의 또는 속인주의 입니다. 즉 외국인이던 자국인이던 그 나라 안에서는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로 기독교를 믿는 것은 뭐라할 수 없으나 선교는 안됩니다. 선교는 아프카니스탄 헌법에 명백히 반하는 범죄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이번 23명의 선교단은 외국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이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자국인,외국인 구별없이 그 나라의 사법체계상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탈레반 테러세력은 그 나라의 사법적 지위를 가진 단체가 아니지만 명백하게 범죄를 저질렀다는건 아프카니스탄 당국의 형사처벌을 받아도 우리로서는 아무런 간섭을 못합니다.

보통은 외국인의 범죄는 형을 받거나 당사국과 협의후 강제추방절차를 밟게 되죠.

이럴땐 우리나라에서 신변을 인도 사법당국에서 처리하게 됩니다.

만일 외국에서 형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나라에서 형을 받지 않는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일사부재리 원칙에서 제외됩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재실형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죠.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번 23명은 아프카니스탄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범죄행위를 저지는 자들이며 죽은 2명은 공소시효가 소멸되고 남은 21명은 범죄자로서 대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답변 : 실정법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실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인식에서 전혀 주관적 당위성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이것은 종교의 문제로 넘어간다면 그 종교의 문제적 당위성에 따라서 판단되어진 가운데서 실정법의 이해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종교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테러주의자들의 세운 지역법의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 현행 국가의 법들로서는 판단중지의 한계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코란의 입각한 그들의 체제에서 발생되는 법이 있음에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종교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서 본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나의 글을 참고하기길 바란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 참고)

이처럼 성립되지 않는 종교의 법적체계의 주장을 폭력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국가나 여론이 비난하는 것이 진정 사태에 있어서 공정성을 오히려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더욱 언급하신 분의 몰지각한 법이해의 의도성은 비난받음의 당위성도 동시에 세워진다고 하겠다.



각주 2) 다음측의 'Tokyo-Athran'님과'금빛여우'님의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에 따른 의도성이 있는 여론몰이적 입장과 종교적 특수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그에 따른 임의적 실정법해석에 따라 무고한 자들을 범법자로 취급함에 있어서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야후측과 다음측은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이지 못한 것을 다음측에서 투표에 붙힌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임의적으로 그러한 분별없는 여론적 입장을 취한 것인지에 대하여서 다음측은 밝히기 바라며 그것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고려할 수 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생각없는 어떤 정치인도 이번 피랍사태를 종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부추기고 있는데, 개념없는 선동은 그만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by voss | 2007/09/01 13:08 | 참고해주세요
포털 다음측은 인권을 유린하는 경향이 있는가..

몇일 전 일이다. 정확히 7월11일 교황의 발언에 있어서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리플을 올렸다.

그런데 다음측에서는 리플에 단 나의 입장에 대한 근거를 말하는 링크의 글을 올렸는데

무단으로 삭제하고 있다.

4차례나 삭제하는 행위는 글쓰는 인격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어떤 상황설명이나 양해나 그런 말도 없이 리플을 삭제한다고 하면 글쓰는 자유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고 통제하며 특정한 기사내용을 특히 특정종교의 비방적 입장을 옹호하는 가운데서 글쓰는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해당 글은 교황의 발언에 대한 것으로서..

http://news.media.daum.net/society/people/200707/11/mk/v17404795.html

 

여기에 대한 리플로서 올렸든 글은

 

1) 중세적 개념에서 신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 이명신님 생각 | 2007.07.11 | | 신의 존재증명을 말하는 아퀴나스적 개념은 증명이라는 것이 비로소 사실을 말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신 존재에 대한 개념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면서 참된 교회라면 웃음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2) 입장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명신님 생각 | 2007.07.13 | | 글이 지워졌더군요.. 말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인데.. 저의 글쓰는 곳입니다. http://sophiadei.blogspot.com/2007/02/blog-post.html

 

2번 글이 계속해서 지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포털사이트의 인권유린적 행위와 그에 따른 글쓰기 통제는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참으로 알바하는 자의 자신의 신앙관에서 비롯되어진 것인지 다음측의 전반적인 인권유린적 입장의 기본인지, 소정의 사과와 이런 일은 추후에 없어서 건전한 글쓰기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역활을 해주기를 바란다.

 

 

 

 

 

참고로 그 올렸던 글은 복사해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by voss | 2007/07/15 01:34 |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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